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옥산 사건 (문단 편집) === 일본인들의 폭동 === 다음날인 1월 19일 밤 일본 청년 동지회 회원과 기타 폭도 30명이 칼과 곤봉, 화약으로 무장하고 일본 승려를 살해한 자들이 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틀림없다는 억지를 부리며 중국기업인 삼우실업사를 공격하여 삼우실업사 소속 수건공장을 닥치는 대로 때려부쉈는데, 삼우실업사가 일본 기업들과 쟁쟁하게 경쟁하는 기업으로 일본상품불매 운동으로 고생하던 일본인들에게 평소에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중국인 경찰 2명을 살해하고 1명을 부상입혔다. 다음날인 20일 오후 다시 봉래로에 흥분한 일본인 거류민 2천명이 일본인 클럽에 모여 중국의 배일운동 진압을 위한 일본군 파병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일본 총영사관, 일본 해군 육전대 본부로 행진했으며 공동조계, 갑북의 규강로, 북사천로 등에서 중국인 행인들을 마구 폭행하고 상점, 전차, 버스를 파괴했으며 조계의 서구 열강 경찰들도 공격해 부상을 입혔다. 당시 상하이 일본 거류민의 5% 정도가 중소 상공업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중국에서 활발히 벌어지던 반일 운동, 일화 배척운동 등으로 인하여 생계에 위협을 느끼자 반동으로 매우 강한 반중감정을 품고 거칠게 행동하였다. 1932년 1월 28일 상하이 일본상공회의소, 재화방적 동업회, 상하이 공업동지회, 미쓰이 물산, 미쓰비시 상사가 모여서 결성한 금요회[* 결성은 1928년 6월.]에서 내놓은 금요회 팸플릿 78호는 자위권 발동으로 만몽문제를 해결하고 일본 배척운동을 근절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국민당이 신봉하는 대외 지도 원리는 단지 '혁명외교에서의 타도 제국주의'뿐이다. 중국 자신의 자각적 각성과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이상, 유일한 최고 방책은 모든 것을 파괴한 후에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다. 이들의 행동에 대하여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도 "당시 우리나라의 신용을 떨어뜨린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